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버닝(한국 영화) (문단 편집) === 인물과 전개에 대한 해석 === * '''영화의 내용은 종수의 소설인가''' 종수가 소설을 쓴다는 점, 특히 종수가 결행하기 전 텅 빈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이 있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왔다. 또한 무슨 소설을 쓸 것이냐는 질문에 종수는 "저는 뭐를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세상은 수수께끼 같거든요."라고 대답한다. 종수를 연기한 [[유아인]]은 영화가 수수께끼를 던졌기 때문에 종수가 무엇을 썼는지 말하는 것도 관객들의 생각을 가둘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경우 영화의 어느 시점부터 종수의 소설인지 의견이 갈린다. * 일단 영화 전체를 종수의 소설이라 보기도 한다. 영화의 모든 것들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고, 해미와 벤은 실재하는 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모호한 말들을 하기 때문이다. * 영화 말미 살인 시퀀스부터 종수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쓸 때부터 시점이 바뀌는 이유를 든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마치 [[액자식 구성]]처럼 창틀(프레임)안에 있는 종수를 보여주며 천천히 줌 아웃한다. 이후 벤이 화장실에서 렌즈를 끼고 연주와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영화 내내 종수의 시점으로 나온 이전 장면들과 이질감이 느껴진다. 또한 벤과 해미와의 관계에서 종수는 늘 행동하는 주체가 아닌 반응하는 객체로 있으며 따라서 유아인의 연기도 리액션 연기 일색이었는데, 해미의 방에서 뭔가를 쓰는 장면에서 촬영 방식이 바뀐 이후로 오직 액션만을 취하며 더 이상 리액션이 없다. * 종수만의 소설 혹은 상상이 산길에서 벤을 추격하다 들켰을 때부터 시작했다는 견해도 있다. 종수는 벤에 의해 역추적당한 이후 트럭을 두고 언덕을 올라가 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화면에서 보이는 둘의 구도는 비현실적이라 꿈처럼 보이는데 마침 다음 장면에서 종수는 악몽을 꾼 것처럼 잠에서 깬다. 이때부터 종수에게 일어났던 혼란한 상황들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누군지 알 수 없었던 전화는 엄마[* 이런 견해로 보면 엄마는 종수가 자기가 편한 대로 상상한 이미지이다. 아빠의 분노 때문에 집을 나간 엄마의 옷을 태운 종수로서는, 처연하고 불쌍한 엄마의 이미지보다는 자기에게 돈달라는 엄마로 상상하는 게 훨 나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종수의 자기합리화.]였고 엄마는 해미가 말한 우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아빠의 재판은 종결됐고 송아지를 팔았다. 벤의 집에 다시 들어가면서 그를 살인자로 거의 확신했고 보지 못했던 고양이를 찾았다. 이후 소설을 쓴다. 이것들은 모두 종수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 플롯일 가능성이 있다. 현실의 종수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지만 종수 내면에서는 바라던 것일 수도 있고, 종수에게 미스터리로 여겨져 혼란만 가중시킨 그것들을 본인 식대로 소설이나 상상으로 해결해 버렸기 때문이다. 종수는 이렇게 비현실을 현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 영화가 종수의 소설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종수가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는 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종수는 소설을 쓰고 싶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후반부 해미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벤을 쫓아다니지만, 종수가 그만큼 해미를 사랑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게다가 종수는 해미를 찾는 것인지, 비닐하우스를 찾는 것인지, 벤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심지어 안개 속에서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 모호했다. 즉 소설을 쓰기 전까지 종수는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혹은 하고는 있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과 쫓는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한 상황에 있었다. 종수가 이런 상황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써야할 것을 찾았다는 의미이자 서서히 점화되고 있는 분노의 원인을 스스로 진단했다는 의미이다. 그 소설의 내용은 종수 내면의 목소리, 바라던 꿈, 희망 등 어떤 것으로든 해석 가능하다. 그래서 종수를 소극적인 인물로 보기도 하지만, 세상의 미스터리를 풀고 자신만의 정답을 찾고자 하는 진지한 인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 예로, 해미가 사라지고 난 뒤 종수가 알바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 해석이 갈린다. 불합리한 상황에서 돌아서는 것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종수를 무기력한 인물로 보지만, 자신을 둘러싼 모호함을 해결하고 그 원인을 찾고자 밖으로 나간 것이라 생각하면 종수가 영화 전반부와 달리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본다.] * 한편, 종수를 영화의 미스터리에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지점, 혹은 종수를 둘러싼 플롯상의 전환점들이 몇 가지 있다. 해미가 종수를 알아본 뒤 팬터마임을 보여주는 장면, 해미가 어릴 적 얘기를 하며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라고 말하는 장면, 벤과 해미가 요리를 할 때 벤이 메타포는 종수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장면[* 이때 종수는 메타포에 대해 답하지 않(못하)고 화장실에 간다.], 벤의 고백을 들은 뒤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는 꿈을 꾸는 장면, 벤에게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베이스를 느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장면 등등. * '''해미는 어디로 갔는가, 해미는 어떤 인물인가''' 해미는 종수를 만난 처음부터 팬터마임을 보여주면서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해미의 고양이와 진짜로 존재했는지 알 수 없는 우물도 마찬가지. 이를 두고 해미가 4차원인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억눌린 현실에서도 영혼만은 자유롭고 초월적으로 살아감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분노조차 억압되어 있었던 종수와는 다른 유형의 인물. 특히 해미는 현실을 초월해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때문에 해미를 가족들의 말처럼 '말 잘 지어내는 애'라고 치부할 수는 없으며, 이 대사도 해미가 가족에게조차 이해 받지 못할 만큼 팍팍한 현실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해미는 실재한다 아니다의 상태가 중요하지 않은 초월적 삶을 갈망하고, 그레이트 헝거의 꿈을 쫓아 그동안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까지 여행을 간 인물이다. 찰나의 빛을 기다리는 상황에 벗어나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며, 그녀가 팬터마임으로 만들어 낸 새 모양처럼 더 자유롭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해미를 힘든 현실 속에서도 각자의 원하는 것을 추구하려는 보통 청년에 가깝다고 보는 생각들이 있다. 해미는 카드빚을 지며 힘들게 살지만 돈을 모아 여행을 가고, 팬터마임을 공부하면서 누구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삶의 의미를 구하려 한다. [[전종서]]는 모든 게 다 좋아지고 있어도 거기에 따라가기가 너무 벅차지만 현실에 순응하고 있기에는 너무 우울할 수밖에 없다면서, 해미의 삶과 현실을 결부시켰다.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이유를 두고 벤을 의심하기 때문에, 해미가 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관점이 첫 번째로 있다. 하지만 순전히 종수의 관점일뿐, 영화 속에서 보여준 몇 가지 단서들을 두고 해미의 행방을 확신하기는 어렵다. 결정적이라 생각되는 해미의 시계의 경우, 영화 속에서는 매우 흔한 물건으로 암시되고, 해미가 떠나기 전 벤에게 주고 갔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해미가 종수를 떠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해미는 종수의 집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마치 '그레이트 헝거'가 된 것처럼 춤을 추고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기를 말하면서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벤의 대사를 보아 해미는 종수를 각별하게 여겼고, (사실이라면) 어릴 적에는 우물에 갇혀 있을 때 종수를 통해 희망의 빛을 보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한 해미는, 노을씬 이후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종수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됐다. 또 다르게는 해미가 자살했을 거라 보는 견해도 있고, 빚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며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것처럼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인데, 이런 해미가 발 디딜 곳이 없어졌다는 것은 이상이 좌절됐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미를 잠적하게 한 원인을 세상 그 자체라고 크게 볼 수도 있다. 슬퍼하며 우는 해미를 보며 신기해 할 뿐이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자 하는 노력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보며, 흥미있어할 뿐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건 영화 속 벤이기도 하지만, 해미와 종수와 같은 이들을 둘러싼 잔인한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극중에서 해미의 서사를 기억해주고 진지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해미는 더욱 외로운 존재로 보인다. 종수는 해미를 제대로 기억 못 하지만 이해하(려)는 인물이었으나, 벤이라는 모호한 세상과 맞닥뜨린 후 해미를 떠나보냈다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을 혼돈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할 수 없는 현실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 '''벤은 진짜 살인자인가, 벤의 정체는?''' 영화가 주는 정보로는 벤이 살인범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벤을 연기한 [[스티븐 연]]도 이에 대해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정답을 주지 않았다. 종수가 해미의 행방과 벤에게 집착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영화는 결국 벤이 살인을 했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벤에 대한 정보들은 확실한 것이 아니며 모호할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벤을 향한 분노를 쌓아왔던 종수의 왜곡된 시각이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 각박한 현실에서 제대로 버닝하지 못한 무기력한 종수가 분노를 적립해오다가, 자신만의 시선에 확신을 갖고 또 다른 방식으로 버닝해버린 것이란 시각이다. 여기에는 또, 종수가 해미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벤을 살인자로 확정해버렸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전개에 대해서는 몇가지 얘기들이 있다. [[유아인]]은, 대부분 판단하고 정의내리고 싶어하는 세상이지만 그렇게 해서 내놓아진 정답에 의구심을 품을 만한 시대를 비유한다고 말하면서, 때문에 명확한 메시지를 주는 것보다 세상에 대한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라 봤다. [[이창동]]은, 부유한 벤이 겉으로 보기엔 잘못이 없고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것 역시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벤의 삶과 태도가 자신도 모르게 종수와 해미 같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누군가의 삶이 의도치않게 또다른 누군가에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가 발생한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벤은 종수와 해미를 대접하고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행동과 말을 그저 재미있는 것으로 삼거나 지루하게 여겨 종수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창동은 다른 인터뷰에서 일상의 작은 것들이 때로는 의심, 두려움, 막막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답이 분명하지 않고 삶이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 할지 모르는 미스터리가 분노로 이어졌을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벤의 모습처럼, 세상은 겉보기에 세련되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벤이 종수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종수가 살고 있는 파주까지 찾아갈 만큼 애정이 있었고, 종수가 벤의 집에 찾아왔을 때 베이스를 느끼라고 했던 것은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종수가 자기 이야기 같다고 말한 윌리엄 포크너의 책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종수에 의해 죽음을 맞을 때 마치 종수를 끌어안는 듯한 모습도 이런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벤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동시에 외로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벤이 죽을 때까지도 해미와 종수를 자신에게 흥미있는 존재로만 여겼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종수가 벤을 어설프게 추격할 때 벤이 모르는 척 한 것도 자신을 찾아오고 따라오는 종수가 지루한 자신의 일상에서 그저 재미있게 느껴졌을 거란 의견이다.[* 벤이 죽을 때의 태도에 대해서도 이 두 해석을 적용해보면 서로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벤이 죽기 전 집에서 파티를 즐길 때, 지루한 듯 보이다가 자신을 관찰하는 종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장면에서도 대비를 느낄 수도 있다. 연애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벤이 종수에게 매우 큰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해석은 무리가 없다. 또한 벤을 어느 캐릭터로 보지 않고 종수가 바라보는 세상의 의인화로 보기도 한다. 종수에게 벤은 수수께끼 같은 세상 그 자체이며 그를 쫓다 끝내 죽이는 건 혼란스러운 세상을 탐색하다 옳든 틀리든 자기의 결론을 내리고 새롭게 시작함을 의미한다는 것. 진실이 무엇이 됐든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은 없는 세상이니 아무리 부조리가 만연한다 해도 종수는 뭐라도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시작은 해미의 행방과 비닐하우스 탐색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종수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기 보다, 답을 이미 정해놓은 채로 단서를 탐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말을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면 희망적이다. * '''고양이는 실재했는가? 벤의 고양이는 보일이 맞는가?''' 해미는 종수에게 팬터마임을 선보이고, 그것을 생각한 종수가 해미의 집에서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을 잊으면 되는 거지?"라고 묻는다. 그러자 해미는 오히려 웃으며 "내가 없는 고양이한테 밥 주라고 너를 우리 집에 불렀을까봐?"하고 말하며 자신은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맞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집 주인은 이 원룸에선 고양이를 기르는 게 금지돼 있다고 말했으며, 여행을 간 보름 동안 고양이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고양이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해미는 고양이가 없다고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있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재밌네'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린다.] 벤의 고양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폐증이 있어서 보름 동안이나 이름을 불러도 안 나오던 고양이가, 그때 이름을 부른 것으로 한 번 다가왔다고 그 고양이가 해미의 보일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 '''영화는 미스터리의 체험을 의도한다?''' 영화가 종수의 시점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관객들은 자연스레 종수처럼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종수의 답인 벤의 살인은 증거가 희미하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종수가 수수께끼 같은 세상 때문에 쓰지 못했던 소설을 쓴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해석과 답을 찾아내 불확실한 인과관계를 나름대로 명확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종수의 판단에 대한 옳고 그름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종수처럼 미스터리에 빠진 관객들은 영화 안에 떨어진 퍼즐 조각들을 맞춰나가지만, 무언가 비어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비어있는 조각을 찾아내기 위해 메타포와 상징을 파고 들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건지 파헤친다. 이것은 극중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탐색하고 벤을 미행하며 진실이 무엇인지 다가가려는 태도와 비슷하다. 그리고 관객들은 종수처럼 자신만의 해석본을 내놓는다. 종수가 고양이, 해미의 시계, 벤의 태도 등을 조합해서 결론을 냈듯이, 관객들도 영화 안의 퍼즐을 조립해 이 영화가 무엇인지 결론을 낸다. 하지만 종수의 그 판단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관객들의 결론도 어느 것이 맞다라고 딱 잘라 얘기하기는 어렵다. 감독의 말처럼 사실은 있지만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가 나온다. 이런 불확실함은 영화를 넘어 현실 세계에 도처해 있다. 영화의 퍼즐을 맞춰나가듯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사상이든 철학이든 각자의 결론을 내고 종수처럼 소설이든 글이든 주장이든 각자의 해석과 판단을 표현한다.[* 이것들은 어쨌든 세상에 퍼져있는 조각들을 맞춰 해석해야 나올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종수의 판단에 대해 확언할 수 없고, 관객들의 영화 해석본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 대한 각각의 판단, 믿음, 사상에 대한 시비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어떤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결국 관객들은 영화 속 종수처럼 미스터리를 체험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객들의 '이게 뭐야'라는 반응을 애초부터 원했을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